2010年1月1日金曜日

[機械翻訳] 菓子

과자 [菓子]

정식 식사 외에 먹는 단맛을 위주로 하는 기호식품.

과자의 종류는 대단히 다양하며, 제조 기원에 따라 한과(韓菓)와 양과(洋菓)로 구분된다.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만들어 오던 과자류는 과일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하여 조과(造菓)라고도 하며, 유밀과(油蜜菓)·강정·산자({{산$01}}子, {{산$02}}子)·다식(茶食)·전과(煎菓, 正菓)·엿〔飴〕등 70여 종의 과자가 만들어졌다.


〔역 사〕

현존하고 있는 우리 나라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과자류의 역사적 상한 시기는 고려시대이지만, 우리 음식을 원류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음식에 과자류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이미 타래과나 강정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뒤 불교의 성행으로 육식을 금하고 소식을 하며 차를 많이 마시는 데 따라 조과류도 급격하게 발달되어서, 고려시대는 연등회·팔관회의 연회, 공사연회와 제연, 왕의 행차, 혼례 등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고려사≫에도 충렬왕 때 세자의 혼인식에 참석하러 원나라에 가서 베푼 연회에 유밀과를 차렸더니, 그 맛이 입 속에서 슬슬 녹는 듯하여 평판이 대단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런 연유로 몽고에서는 유밀과를 특히 ‘고려병(高麗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밀과는 곡물·꿀·기름으로 만들어지는 사치스러운 식품으로 귀족들과 사원에서 만듦으로써,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말이 아니게 되어 1192년(명종 22) 유밀과의 사용을 금하고 나무열매를 쓰라는 명령을 내렸고, 1353년(공민왕 2)에도 유밀과 사용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조선시대도 조과류는 널리 사용되어 혼례·제향·헌수 등 의례음식에 꼭 쓰였다. 그리고 과자류의 금지도 계속되어, ≪대전회통≫에도 헌수·혼인·제향 외에 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조과류는 조선시대에 상품화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각 가정에서 직접 만들었고, 이에 필요한 재료를 상비하고 있었다. 또한 조과는 잔칫상차림에 높이 괴어 올리는 것이 관례여서, 조과의 전문기술이나 굄새를 잘하는 사람이 초빙되어 그 일을 담당하였다.

1884년(고종 21) 한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손택(孫澤)이 정동구락부를 개설하여 서양 음식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서양 과자가 도입되었다. 서양에서 과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 수천 년 전인 메소포타미아시대로, 이것이 그리스·로마·이집트로 전해지면서 1세기경 남부유럽에서 과자의 제조가 크게 성행하였다. 15세기 말 미국 대륙이 발견되어 다량의 설탕과 코코아·커피 등이 유럽에 반입되면서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울의 상류층에서 주로 연말연시 선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20년 초 우리 나라 최초의 양과자점이 문을 열었으며, 1940년까지는 서울에 140여 개의 양과자점이 생겨났다. 광복 이전까지 우리 나라에는 10여 개의 제과공장이 있었으나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제과산업은 1945년 민후식·신덕본·박병규·한달성 등이 설립한 해태제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동양제과가 설립되어 이 두 업체가 우리 나라 제과산업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1960년대 말까지 드롭프스·웨하스·비스킷·양갱류를 생산하였고, 1967년에는 국산 초콜릿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같은해 롯데제과가 설립되어 껌을 비롯한 다양한 과자가 생산되었으며, 그뒤 수년간 우리 나라의 제과산업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빙과류(氷菓類)는 1970년 해태제과가 현대식 아이스크림 생산시설을 도입하면서 이전의 아이스케이크 형태를 띤 단순한 동결제품에서 탈피, 아이스크림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대일유업·삼강산업 등 대형 제조업체가 자리잡게 되었다. 생과자류는 1970년 초까지 소규모의 제과점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1972년 샤니케익이 설립되고 기존의 유명 제과점들이 연쇄점을 만들어 대형화하기 시작하여 1986년에는 700여 개의 점포가 생겼다.

1976년부터는 껌을 비롯한 과자류의 해외 수출이 시작되어 동남아시아·미주·유럽·중동·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제과산업이 국제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러시아 등이 새로운 수입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 과〕

① 약과류:밀가루에 꿀·기름을 넣고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지진 것으로, 약과·연약과·만두과·다식과 등이 있다. 기름에 지질 때 기름이 약과에 속속들이 배어들도록 130℃ 전후의 온도에서 지져야 하며, 다시 꿀에 재어 꿀이 배어들도록 한다.

약과류의 단면은 여러 켜로 포개진 듯하고, 그 사이에 기름과 꿀이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에는 새·붕어·과일 등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나게 썰거나 판에 찍어 국화 문양으로도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높이 괴어 올리는 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② 박계류:밀가루에 소금 간을 하고 꿀을 섞어 되게 반죽해서 높은 온도의 기름에 지진 것으로, 대박계·중박계 등이 있다. 기름을 섞어 반죽한 것이 아니므로 단면에 여러 켜가 생기지 않고, 또 높은 온도에서 지진 것이므로 속에 기름이 배어 있지도 않다. 잔치에서보다 제향음식으로 쓰인다. ③ 다식류:쌀·깨·밤·송화 등의 가루에 꿀을 섞어 판에 찍어낸 것으로, 밤다식·송화다식·흑임자다식·잡과다식·용안육다식·녹말다식 등이 있다.

④ 산자·강정류:산자와 강정은 모두 찹쌀가루에 술과 꿀을 섞어 찐 것을 공기가 섞이고 끈기가 생길 때까지 쳐서 갸름하게 썰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 고물을 묻힌 것이다. 산자에는 밥풀산자·매화산자·연사과·빈사과 등이 있고, 강정에는 깨강정·개피강정·잣강정·송화강정 등이 있다. 산자와 강정은 연하고 속이 비어 있어, 씹으면 바삭하는 소리가 날 만큼 튀겨져야 좋다.

⑤ 정과류:과실이나 연근·생강·도라지 등을 꿀에 졸여 만든 것으로, 모과정과·유자정과·생강정과·천문동정과·연근정과·도라지정과 등이 있다. ⑥ 숙실과:율란·조란·밤초·대추초 등이 있다. ⑦ 과편:과일즙에 녹말을 섞어 굳힌 것으로, 앵두편·녹말편·산자편 등이 있다. ⑧ 엿:조청·강엿·깨엿·생강엿 등이 있다. ⑨ 엿강정:깨엿강정·호두엿강정·땅콩엿강정 등이 있다.


〔양 과〕

저장성에 따라 생과자·건과자(乾菓子)로 나누기도 하고, 반죽의 형태에 따라 반죽형·거품형·혼합형으로 나누며, 부풀리는 방법에 따라 화학적으로 부풀린 제품, 효모로 부풀린 제품으로 나눈다. 특수한 형태로는 냉동과자가 있다.

① 생과자:저장성이 낮아 가정이나 제과점에서 매일 생산해야 하는 것으로, 케이크·파이·도넛·빵과자 등이 있다. ② 건과자:저장성이 높아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스낵과자·비스킷·초콜릿·사탕·껌 등이 있다. ③ 화학적으로 부풀린 제품:파이·비스킷·쿠키 등이 있다. ④ 효모로 부풀린 제품:크래커·도넛 등이 있다. ④ 반죽형:유지류와 화학팽창제를 쓰는 것으로 파이·쿠키 등이 있다. ⑤ 거품형:유지류를 쓰지 않고 달걀 단백질을 주로 쓰는 것으로 케이크류가 있다. ⑥ 혼합형:거품형과 반죽형의 방법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⑦ 냉동과자:무스·아이스크림·셔벗(sherbet) 등이 있다.


〔현 황〕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외래 문화가 급격히 도입되어 양과자는 우리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값싼 밀가루와 정부의 분식장려시책으로 비스킷류가 간식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주로 사용해 오던 한과류는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민경제가 윤택해지고, 설탕·지방 등 고열량 식품의 과다 섭취로 인한 비만증·성인병의 위험이 커짐에 따라, 맛이 담백하고 품위가 있는 조과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다. 즉 제과업계는 그 동안의 기술 축적을 이용하여 한과류를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형태의 한과들이 대량생산되고 있으며, 한과 전문 제과점도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韓國食品史硏究(尹瑞石, 新光出版社, 1974)
≪참고문헌≫ 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李盛雨, 鄕文社, 1978)
≪참고문헌≫ 小麥과 製粉工業(韓國製粉工業協會, 1985)
≪참고문헌≫ 食品業成長史-製菓篇-(鄭普永, 現代食品 14-21)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300406&v=42

[機械翻訳] 豆腐

두부 [豆腐]

콩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추출하여 무기염류로 응고시킨 식품. 두부의 ‘부(腐)’는 썩은 것이란 뜻이 아니고 뇌수(腦髓)처럼 연하고 물렁물렁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포(泡)’라고도 하였다.

두부는 ≪명물기략 名物紀略≫·≪재물보 才物譜≫ 등에는 서기전 2세기경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이 발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의 중국문헌에 처음 나타나므로 한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 나라에 두부가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목은집≫ 중의 〈대사구두부래향 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시에 ‘두부’의 명칭이 처음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 가장 교류가 빈번하였던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두부제조법이 더욱 발달하였다.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서 온 여인이 각종 식품제조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두부를 잘 만든다고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도 ≪도문대작 屠門大嚼≫·≪주방문 酒方文≫·≪산림경제≫ 등 많은 문헌에 두부 만드는 법과 종류, 두부요리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두부는 가공법에 따라 보통두부·순두부·건조두부·자루두부·연두부·얼린두부·튀김두부·압착두부·유바(yuba)·수푸(sufu) 등으로 구분한다.

두부 만드는 법은 하루 동안 물에 불려 둔 콩을 맷돌에 간다 그 다음에 콩의 10배 정도의 물을 넣고 5∼10분 정도 끓인 다음 자루에 넣고 짠다.

여기서 나온 두유(豆乳)를 70∼80℃ 온도로 유지시키면서 염화칼슘·염화마그네슘·황산칼슘 등의 응고제를 첨가하면 단백질이 응고된다. 단백질이 응고되면 성형틀에 삼베천을 깔고 응고된 것을 붓고 판을 대어 돌로 눌러 탈수시킨다. 물이 빠지면 칼로 그어 두부를 떠낸다.

두부는 생두부로 먹거나 국·찌개·부침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조리한다. 찌꺼기인 비지도 발효시켜 비지장을 만들어 먹는다. 두부를 만드는 도중에 순두부를 따끈하게 양념하여 먹기도 한다.

콩은 약 40%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영양이 우수하나 소화율이 좋지 않아 볶거나 쪄서 먹을 경우에도 소화율은 50∼70%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두부는 콩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93% 이상, 탄수화물의 85% 이상, 지방의 95% 이상, 비타민의 50∼60% 이상을 함유하면서 소화율이 95%나 되는 우수한 단백질식품이다. 두부 단백질은 육류 단백질보다 값이 훨씬 싸므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리하다.

우리는 예로부터 두부를 자주 만들어 먹었고 관혼상제 때에도 빠짐없이 상에 올렸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두부를 만들 때 쓰는 맷돌이 남아 있어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다. 아낙네들이 순두부와 두부를 사랑방으로 보내면 남자들은 두부와 함께 술도 한잔 하면서 자그마한 잔치를 벌이게 마련이었다.

≪참고문헌≫ 高麗以前의 韓國食生活史硏究(李盛雨, 鄕文社, 1978)
≪참고문헌≫ 韓國料理文化史(李盛雨, 敎文社, 1985)
≪참고문헌≫ 大豆蛋白質과 그 特性(李春寧, 食品科學 14-1, 1981)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412&v=42

두부
[豆腐, bean curd]

맛이 부드럽고 자극이 없는, 콩으로 만든 음식.

한국·중국·일본 및 동남아시아에서 단백질의 주요 급원으로 쓰이며 기원은 중국 한나라(BC 206~AD 220) 때라고 여겨진다.

두부를 만들려면 먼저 마른 콩을 물에 담가 불린 후 갈아서 끓인다. 이때 비지라는 연한 고체 덩어리와 콩의 액상인 두유가 분리된다. 두유에 염화칼슘·염화마그네슘·황화마그네슘 같은 응고제를 첨가하면 응고물과 여액이 생기는데, 이 두유를 틀에 부으면서 탄수화물 성분이 많은 여액을 따라버린다. 나중에 남은 부드러운 덩어리는 통째로 또는 낱개로 네모지게 잘라서 물에 담가 놓는다. 두부는 6~8%가 단백질이며 칼슘·칼륨·철분 함량이 높다. 제조과정중 부산물로 생기는 비지와 여액도 먹을 수 있다. 또한 두유의 상층부에 형성되는 피막은 걷어내어 판 위에서 말린 다음 야채요리에 쓴다. 석쇠구이·튀기기·끓이기·볶기·찌기 등의 요리법이 있으며 그냥 날것으로 먹기도 한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28323&v=42

 

numlk01|10-09 14:37

単なる説明文の翻訳です。

numlk01|10-11 12:40

李穡「牧隠集」大舍求豆腐来餉「菜羮無未久 豆腐截肪新 便見宣疎歯 真堪養老身」

numlk01|10-11 13:17

http://www.cjstory.com/old/2004_05/html/story1_06.html?m=m&s=s

0020__|10-09 20:07

グルメではお世話になりましたwレシピは朝鮮時代になってからなんですね。

tinita|10-09 21:38

にがりに相当することばが味気ないね。

numlk01|10-11 10:18

ちなみに、18世紀の朝鮮の料理書『閨閤叢書』には、次のような豆腐の作り方が示してあると、『健康食とうふ』にある。「新しくとれた粒ぞろいの大豆を陽に乾かし、石臼でひいて冷水に浸け、皮をとってから、もう一度石臼で細かくひく。釜に熱湯を沸かし、石臼でひいた大豆をこれに入れる。これを木綿の袋に入れ、素焼きの平たい容器の上でもみ押さえながら絞り出す。絞りながらさらに熱湯をかけ、押えて充分に絞る。粉の部分が全部絞り出されたら、もう一度釜に戻し、火を強く焚きつけ沸騰させる。しゃもじでよくかきまぜながら、素焼きの容器に汲みとる。ひと息ついてから鹹水(かんす、にがりのこと)を少しずつ加えて固める。かたいやわらかいは適宜に判断すること。鹹水が多すぎるとすえた匂いがする。」・・・出版時期は、1815 年。19世紀初頭の書籍になります。http://www.enjoykorea.jp/tbbs /read.php?board_id=thistory&nid=1904787..

numlk01|10-11 12:31

文宗 6卷, 1年( 1451 辛未 / 명 경태(景泰) 2年) 2月 22日 辛卯 5번째기사 ○大護軍鄭孝康上言曰: “鹽田以牛耕治, 雜以便旋煮鹽, 必不精潔。 祭享及供上豆腐, 用此水, 未便。 請用酸水。” 上謂諸承旨曰: “合豆腐用何水? 或云: ‘用鹽之融液者’, 或云: ‘海水’, 未知孰是。” 李季甸等對曰: “用鹽之融液, 俗謂艮水。” 上曰: “艮水不潔, 不可用於造豆腐。” 孝康無才行, 酷好佛道, 爲媒進之階, 其言多類此。

[機械翻訳] 散炙

산적 [散炙]

산적이라는 용어는 ≪궁중발기 宮中撥記≫·≪진찬의궤 進饌儀軌≫ 등에 보이고 있다. 산적의 종류는 육산적·어산적·송이산적·파산적·떡산적·잡산적·섭산적 등 다양하다.

육산적은 연한 살코기를 두께 1㎝, 길이 5∼6㎝로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간이 배면 꼬챙이에 꿰어서 구운 것이다. 육산적은 제상의 제물로 쓰이며, 밥반찬 또는 면이나 떡국의 웃기로도 쓰인다. 어산적은 생선과 쇠고기를 양념하여 꼬챙이에 꿰어서 굽는 것이다. 어산적에 좋은 생선은 민어이다. 대구는 살이 물러서 부스러지기 쉽다.

송이산적은 송이의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썬다. 쇠고기도 송이와 같은 크기로 썰어 양념장에 잰다. 이 둘을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구운 것이다. 송이는 마늘을 넣지 않은 양념장을 쓰며, 또 오래 구우면 향기가 없어지므로 겉만 익을 정도로 살짝 굽는다.

파산적은 파와 고기를 섞어 꿰어서 구운 것이다. 겨울에는 움파가 좋고 가을에는 쪽파가 좋다. 떡산적은 쇠고기와 흰떡을 꿰어 양념하여서 구운 것이다. 잡산적은 쇠고기와 염통·천엽 등의 소 내장을 파와 함께 색 맞추어 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이다.

쇠고기는 간장으로 간을 하고 소의 내장은 소금으로 간을 하여 양념한다. 섭산적은 쇠고기를 곱게 다져서 갖은 양념을 한 다음에 동글납작한 모양이나 두께 7㎜ 정도로 반대기를 만들어 구운 것이다. 노인과 어린이에게 좋은 음식이다.

≪참고문헌≫ 李朝宮廷料理通攷(韓熙順·黃慧性·李惠卿, 學叢社, 1957)
≪참고문헌≫ 韓國飮食-歷史와 調理-(尹瑞石, 修學社, 1980)
≪참고문헌≫ 韓國料理文化史(李盛雨, 鄕文社, 1985)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468

20080219120342194255999300

 

numlk01|02-19 21:00

Bulgogiの元になったと言われている宮廷料理らしい。調査は続行中です。

tenmamm|02-19 21:18

韓国人って繰り返し火達磨になるのが好きですねw

numlk01|02-19 21:23

現在の”肉焼き”発展史の発信源が、何となく分かってきました。あとは、これを平行して調査すれば良さそう。なお、その結果、誰が狩られることになろうとも、知ったこっちゃない。

naver007|02-19 21:22

「ノビアニグイ」って漢字でどのように書くのでしょうね。黄さんの本で、宮中には満州語がけっこう残っている(水刺など)という話が印象的だったので、ノビアニもそちら系か?とも思ったりしました。

numlk01|02-19 21:25

「ノビアニ」って、料理本によって作り方が違ったりしますよね。だから、実は「ノビアニ」って何?ってところから難しくて・・・w。特に、韓一館の写真は、やばすw。

numlk01|02-19 21:27

今のところ、漢字表記を示し得たIDは皆無。ようやく漢字表記のある宮廷料理にぶつかった段階です。とはいえ、実は詳しい人は、私の様子を生暖かく見守っているだけの悪寒がします。たぶんそう。

naver007|02-19 21:28

うーん・・・ますます漢字表記が気になる。教えてくれる親切な韓国人はいないですか?(゚∀゚ )

naver007|02-19 21:30

生暖かく見られても、別にいいじゃありませんか。調べてる過程が楽しいのですからw

numlk01|02-19 21:31

そう思います。楽しんだ人が勝ちw。

tamiya|02-19 23:44

モンゴルの串焼きじゃん。中国の回族料理行くとあるよ。豚は宗教的に禁止だから羊か牛を串にさして焼いてる。

numlk01|02-20 00:02

ショルラッグですよね。 http://www.asahi-kasei.co.jp/saran/recipe/0780.html

numlk01|02-20 00:13

清真料理では、羊肉串ということになるのかな。で、”ケバブ”との関係はどうなるのかという問題になりますね。

hiroshimania|02-20 01:13

薬味カルビクイの元祖?

0020__|02-20 01:39

既出かもしんないけど串料理にこんなのがある 「信使通筋覚書朝鮮@人好物附の写」(1711年 正徳元年 岩国徴古館所蔵)「肉を薄平に切りて小串のさし、油、醤油にて炙、山舛のこり、胡椒の粉を少しふりてよし」(朝鮮通信使 辛基秀著 104P、焼肉文化に鄭教授の解説有り)日本側が作った奴

numlk01|02-20 02:02

”カルヒ”ですよね。